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문단 편집) ==== 통치 방식 ==== 이 시기 군부정권은 한국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유사한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의회와 정당은 모두 해산되었고, 법관의 80%는 쫓겨났으며 헌법의 중요 조항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모든 요직은 군 장교들이 차지했으며 모든 입법권은 9명으로 이루어진 군사위원회가 행사했고, 대통령이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일체의 집회와 시위, 정치 활동은 물론, 일반 국민들의 자유로운 출국도 금지되었다. 당연하지만, 언론 탄압도 자행되어 당시 신문을 인쇄하려면 전체 판의 사본을 군부에 보낸 후 승인을 받아야만 했으며, 인권 탄압 사례들을 보도하는 언론들도 '전복적인 목표물에 대한 군사 작전'이라는 표현을 써서 군부 입장에서의 보도를 내보내야만 했고, 이를 어긴 언론인들은 사형당했다. [[성소수자]] 탄압도 극심하여 400명의 성소수자들이 강제 구금 후 실종되기도 했다. 거기다가 비델라는 유치원 교사들에게 유치원생들을 감시하며 유아기의 어린이들에게 잠재된 '전복적인 가능성'을 찾도록 지시하고 '반항적인 태도로' 아이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찾아내도록 했으며, 어린이들에게 '서구와 기독교적 가치'를 존중하며 '전복적인' 단어를 쓰는 선생님들을 비난하는 것을 권장했고,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학생들이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에 물들어가는지 알아야 한다'는 이유로 정부 차원에서 책자까지 만들어 배포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1979년 초부터는 8세~14세 정도의 어린이들 12,000명 정도로 구성된 '''어린이 헌병대'''까지 만들어 이들을 군사 퍼레이드에 동원하며 어린이들을 정부의 친위대마냥 동원하기도 했다. [[http://www.scielo.org.ar/scielo.php?script=sci_arttext&pid=S1851-28792011000100003&lng=es&nrm=iso|참고자료]] 실제로 [[프리덤 하우스]]가 1972년부터 매년마다 발표하는 [[세계의 자유]] 지수에 따르면, 군사정권 시대였던 1976~1983년까지 아르헨티나의 자유 지수는 1977년 한 해[* PR, CL 모두 6을 기록해 평균 자유 지수가 6이었다.]를 제외하면 PR 6, CL 5로 평균 자유 지수는 5.5로, '부자유'에 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